본문 바로가기
영국에서 뉴스 보기/영국 뉴스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시대의 양심이 떠나다: 그의 생애와 유산

by 40대 유학&여행 2025. 4. 21.

 

목차

  1.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전 세계의 애도 속에서
  2. 라틴아메리카에서 바티칸까지: 프란치스코의 여정
  3. 가난한 자들의 벗이자 행동하는 교황
  4. 전쟁과 이민자 문제에 대한 교황의 목소리
  5. 종교 간 대화와 사회 정의를 향한 외침
  6.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긴 유산과 향후 교황청의 과제

1.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전 세계의 애도 속에서

2025년 4월 21일, 전 세계는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마에서 향년 88세로 선종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전 세계 언론에 헤드라인으로 보도되었고, 수많은 신도와 지도자들이 애도의 뜻을 전했습니다. 바티칸은 공식 성명을 통해 "평생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한 고귀한 삶을 마감했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그는 선종 전날까지도 부활절 미사를 통해 신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사명을 다한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의 장례는 생전 뜻에 따라 간소하게 치러질 예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시절 내내 겸손과 검소함을 실천했고, 교황의 권위보다는 '가난한 자들의 벗'으로 남고자 했습니다. 이에 따라 성대한 장례 행렬보다는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중심으로 한 조용한 작별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성 베드로 광장은 추모객들로 가득 찼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과 기도를 통해 마지막 인사를 건넸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부터 제266대 교황으로서 12년간 재임하며, 종교의 경계를 넘어선 인류애를 실천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정의와 평화, 약자 보호를 실천한 도덕적 권위자였습니다. 그의 선종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도 그를 추모하며 "현대 세계가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양심의 지도자였다"고 평가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공개 행보는 미국 부통령과의 비공식 면담과 부활절 미사였습니다. 폐렴과 신부전 등으로 고통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까지 메시지를 전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관된 삶의 태도였으며, 끝까지 신자들과 함께하고자 한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2. 라틴아메리카에서 바티칸까지: 프란치스코의 여정

프란치스코 교황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이며, 193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플로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신앙과 공동체 중심의 삶을 익히며 성장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화학 기술을 배우며 세속적인 길을 걸었지만, 1956년 신학교에 입학해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고, 1969년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회 소속으로 1973년부터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을 맡아 활동했으며, 이 시기 빈민가와 교도소, 노동조합 등을 돌며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하는 사목을 실천했습니다. 교구장 시절에도 주교 전용 관저를 거부하고 일반 아파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동하며 검소하고 인간적인 삶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훗날 교황으로서 보여준 검소한 삶의 철학의 연장선이기도 합니다.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2001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되며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중심보다는 주변부에 머무르며, 항상 약자와 함께하는 사목을 중시했습니다. 이 시기의 활동은 후일 교황으로서의 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교회 내 계층 구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는 데 기반이 되었습니다.

 

2013년 베네딕토 16세의 전격 사임 후, 프란치스코는 다섯 차례의 투표 끝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말라"는 말을 들으며, 교황명으로 ‘프란치스코’를 택했습니다. 이는 ‘빈자의 성자’로 알려진 13세기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가난과 겸손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비유럽 출신 최초의 교황이자, 라틴아메리카 출신으로는 최초의 교황입니다. 이는 가톨릭 교회의 지리적·문화적 다원성을 반영하는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그의 출현은 교회의 중심이 서구에서 글로벌 남반구로 이동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3. 가난한 자들의 벗이자 행동하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기간 동안 '가난한 자들의 벗'이라는 별칭답게,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하려는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그는 화려한 교황궁 대신 바티칸 내 손님용 숙소에 머물며, 일상적인 복장을 고수하고, 교황 차량 대신 소형차를 이용하는 등 삶으로 보여주는 겸손을 실천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교황이라는 자리의 상징적 권위보다 인간적인 본보기를 보여주는 리더십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는 특히 도시 빈민, 이민자, 노숙인, 병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해 깊은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교황은 종종 병원이나 교도소, 이민자 수용소 등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기도하며 안부를 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프란치스코는 '말보다 행동하는 교황'으로 각인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통적인 교회 교리를 단호히 지키는 보수적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집행하는 방식에서는 개방성과 유연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컨대 동성애에 대해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며 포용의 메시지를 보냈고, 미혼모에게 세례를 거부한 사제에게 질책을 가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처럼 그는 교리의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사랑과 자비를 우선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의 경제관 역시 눈길을 끌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비판하며 "경제적 살인은 현대판 살인"이라는 강경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는 부의 편중, 사회 양극화, 노동자의 소외 문제를 교회가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으며, 실제로 교황청 내에서도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의 이런 행보는 단순히 교회 내부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의 도덕적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종교를 넘어 정치, 경제, 문화 분야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윤리적 리더십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는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4. 전쟁과 이민자 문제에 대한 교황의 목소리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내내 전쟁 반대와 이민자 인권 보호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분쟁과 난민 문제에 대해 국제사회가 외면하지 말고 책임감을 가지고 대응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2013년 미국의 시리아 공습 계획에 맞서 전 세계적인 금식과 기도를 요청했던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그는 폭력보다는 대화와 화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기도문을 전 세계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2015년 내전 중이던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해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간 화해를 호소했으며, 이슬람권 지도자들과도 직접 만나 종교 간 평화 공존의 중요성을 설파했습니다. 그는 분쟁지역에 평화를 가져오고자 중재자로 나서기도 했으며,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가자지구 분쟁 등 국제적 갈등에 대해 꾸준히 발언해 왔습니다.

 

그는 난민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유럽의 난민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바티칸 내 수도원과 교구에 난민 수용을 독려하고, 각국의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민자와 난민은 숫자가 아니라, 우리 형제자매입니다"라는 말을 통해 인간 중심의 정책을 촉구했습니다.

 

자서전 『희망』에서도 그는 자신의 이민자 가문 배경을 밝히며, 전쟁과 가난, 인종 차별로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했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조부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이민자로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건너온 인물로, 이러한 가족사의 영향이 그의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쟁과 이민자 문제를 단지 정치적 이슈가 아닌, 인간성 회복의 문제로 접근했습니다. 그는 국제사회가 물질적 이익보다 인간 생명을 우선해야 하며, 모두가 한 형제자매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5. 종교 간 대화와 사회 정의를 향한 외침

프란치스코 교황은 종교 간 대화와 사회 정의 실현에 있어 큰 역할을 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신앙의 다양성과 평화 공존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제시했습니다. 2016년에는 러시아정교회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와 역사적 회담을 가졌고, 같은 해 이슬람 수니파 최고지도자 셰이크 알타예브와도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는 세계 주요 종교 간 실질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종교 간 충돌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러시아정교회와 관련된 단체 활동을 금지하자 "종교의 자유는 인류 보편의 권리"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는 특정 국가나 교리를 초월한 도덕적 판단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교황의 중립성과 정의감을 드러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사회 정의에 대한 교황의 관심은 교회 개혁에도 이어졌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바티칸 내 금권주의와 성 비위 사건 등을 강하게 비판하며, 교회 내부의 도덕성과 신뢰 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특히 성직자 성추문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천명하고, 수사와 징계를 강화했습니다. 이는 교황청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정의를 단지 이념이나 이론으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고통받는 사람들 곁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사회 시스템 속에서 잊힌 이들을 위한 변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와 연설은 항상 인간의 존엄성, 연대, 자비라는 키워드로 가득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교회가 세속 권력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전 세계 수많은 신자에게 깊은 영적 울림을 주었으며, 가톨릭 교회의 방향성과 정체성에도 큰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6.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긴 유산과 향후 교황청의 과제

프란치스코 교황은 12년의 재임 기간 동안 단순한 종교 지도자를 넘어, 시대정신을 반영한 도덕적 리더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무엇보다도 약자 중심의 목회, 겸손한 리더십, 그리고 정의와 평화를 위한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인간 중심, 신자 중심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개혁을 시도했고, 그 결과 교회는 보다 열린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떠난 자리에는 이제 새로운 과제가 남았습니다. 가장 먼저는 그가 추진하던 교회 개혁의 지속 여부입니다. 교회 내부의 투명성, 성직자의 도덕성 회복, 여성의 역할 확대 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으며, 차기 교황이 어떤 방향으로 이를 이어갈지가 주목됩니다. 특히 보수와 진보 간의 균형을 어떻게 잡아갈지에 대한 관심도 큽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국제사회에서의 역할도 컸습니다. 전쟁 반대, 기후 위기 대응, 난민 인권 보호 등 글로벌 이슈에 대한 교황청의 입장은 이제 더 이상 종교계의 울타리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새로운 교황은 이러한 국제적 리더십을 어떻게 계승할지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의 죽음은 슬픔이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계속 살아 움직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교회는 누구를 위한 공동체인가? 세상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자들의 책임일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딴 '프란치스코의 교회'는 이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시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여준 진정한 신앙, 인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은 용기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