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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18] 자유의 여신상, 왜 프랑스 정치인은 반환을 요구할까?

by 40대 유학&여행 2025.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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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프랑스 정치인 라파엘 글뤽스만(Raphaël Glucksmann) 유럽의회 의원이 미국에 자유의 여신상을 돌려달라고 주장하면서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으며, 자유의 상징이 더 이상 뉴욕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 백악관은 "프랑스가 지금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미국 덕분"이라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자유의 여신상이 왜 처음부터 뉴욕에 위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자유의 여신상의 역사와 현재 논란에 대한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자유의 여신상, 어떻게 탄생했을까?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은 19세기 후반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조각상입니다. 이 선물은 177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고, 양국 간의 우정을 상징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1) 프랑스가 미국에 기증한 이유

19세기 프랑스는 여러 차례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왕정과 공화정이 반복되는 가운데, 미국은 프랑스 혁명의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공유하는 국가로 여겨졌습니다.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에두아르 르네 드 라불레(Édouard René de Laboulaye) 는 미국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상징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선물을 보내자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그는 미국을 롤모델로 삼아 프랑스에도 민주주의가 자리 잡기를 희망했습니다.

 

이 아이디어를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Frédéric Auguste Bartholdi) 가 받아들여 설계를 시작했습니다. 조각상의 내부 구조는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 (에펠탑을 설계한 엔지니어)이 맡아 강한 철골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2) 뉴욕에 세워진 이유

  • 뉴욕 항구의 상징성: 19세기 후반, 뉴욕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는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도착하는 항구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미국으로 입국할 때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자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로 평가되었습니다.
  • 베드로스 섬(현재 리버티 섬)의 위치: 뉴욕 항구 한가운데에 위치한 베드로스 섬은 이미 연방 정부의 소유였고, 바다에서 잘 보이는 지리적 특징 덕분에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기에 이상적인 곳이었습니다.
  • 미국 내 기금 조달 문제: 프랑스는 자유의 여신상을 기증했지만, 조각상을 세울 받침대를 만드는 비용은 미국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초기에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공사가 지연되었습니다. 이때, 신문사 발행인이었던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 가 대중을 대상으로 기부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그는 신문을 통해 국민들에게 자유의 여신상의 의미를 강조하며 기부를 독려했고, 결국 수많은 미국인이 기부에 참여하면서 필요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3) 프랑스에서 뉴욕까지의 이동 과정

프랑스에서 뉴욕까지의 이동 과정

  • 프랑스에서의 제작 및 해체: 조각상은 프랑스 파리에서 제작되었고, 완성된 후에는 해체 작업을 거쳐 214개의 나무 상자에 담겼습니다.
  • 운송 과정: 1885년 6월, 프랑스 해군 함선 이사베르(Isère) 에 실려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3,500마일(약 5,600km)을 항해한 후, 뉴욕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 조립 작업: 뉴욕에 도착한 자유의 여신상 조각들은 약 4개월 동안 다시 조립되었습니다. 에펠이 설계한 강철 구조를 바탕으로 조립이 진행되었고, 1886년 10월 28일에 공식적으로 제막식이 열렸습니다.

2. 자유의 여신상의 의미

자유의 여신상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이민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상징 이었습니다.

 

이 조각상이 미국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민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역할 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수많은 유럽 이민자들이 미국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선택했습니다.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온 이민자들은 엘리스 섬에서 입국 심사를 받기 전에 뉴욕 항구에서 처음 마주하는 것이 바로 자유의 여신상이었습니다. 그녀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횃불은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는 자유의 빛 을 상징했으며, 왼손의 서판에는 미국 독립기념일(1776년 7월 4일) 이 새겨져 있어 미국의 독립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받침대에는 엠마 라자루스(Emma Lazarus) 의 시 "The New Colossus" 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시에서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친 자, 가난한 자, 자유를 찾아 떠도는 대중을 나에게 보내라."

 

이 구절은 당시 수많은 이민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 로 작용했습니다.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억압을 피해 온 사람들에게 자유의 여신상은 단순한 동상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기회의 상징 이었습니다.

또한,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 내에서 여성의 권리와 평등 을 주장하는 상징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여성 참정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자유의 여신상이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는 여성 운동가들의 상징적인 아이콘 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의 여신상은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 으로도 자리 잡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재와 억압에 맞서 싸우는 나라들은 자유의 여신상을 자유와 정의를 지키려는 의지 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냉전 시대에는 미국과 서방 세계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국가 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조각상을 선전 도구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자유의 여신상은 단순한 미국의 랜드마크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상징 이 되고 있습니다. 관광객들에게는 뉴욕을 대표하는 명소이자, 미국의 역사적 유산으로 자리 잡았으며, 인권과 자유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습니다.

3. 현재 논란, 자유의 여신상을 돌려줘야 할까?

프랑스 정치인 라파엘 글뤽스만은 최근 인터뷰에서 "미국의 현재 행보를 보면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특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이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 백악관 대변인은 "프랑스가 지금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미국이 세계대전에서 도와줬기 때문"이라는 강경한 반응을 보이며 반환 가능성을 일축했습니다. 이는 자유의 여신상이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미국과 프랑스 간의 깊은 관계를 상징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4. 결론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와 미국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상징이지만, 최근 정치적 논란으로 인해 반환 요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자유의 여신상은 단순히 한 나라의 소유물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대표하는 유산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앞으로 이 논란이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봐야겠지만, 자유의 여신상이 가지는 의미는 변함없이 전 세계의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상징으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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