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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안중근 의거는 테러인가 독립운동인가? 국제법으로 본 역사적 판결

by 40대 유학&여행 2025. 5. 8.

 

목차

  1. 하얼빈의 총성과 역사적 맥락: 안중근 의거의 배경
  2. ‘의사(義士)’인가 ‘테러리스트’인가: 시각의 갈림길
  3. 국제법에서의 ‘테러’ 개념과 적용 기준
  4. 식민지 지배 하 독립운동의 국제법적 지위
  5. 안중근 재판과 당시 일본의 논리, 국제사회의 침묵
  6. 현대 국제법 기준에서 본 안중근 의거
  7. 결론: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정의, 그러나 변하지 않는 정신

1. 하얼빈의 총성과 역사적 맥락: 안중근 의거의 배경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대한제국의 의사 안중근이 일본 제국의 초대 조선통감이자 총리대신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암살 사건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국권을 침탈당한 대한제국 국민이 식민지화에 저항하기 위해 수행한 극적인 행위였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은 사실상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있었으며, 이토 히로부미는 그 과정을 주도한 핵심 인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안중근은 이토를 처단함으로써 조선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했고, 그는 하얼빈 의거 직후 체포된 뒤에도 자신이 독립군의 일원이며 정당한 ‘전쟁행위’를 수행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민중에게는 영웅적 의열 투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일본 제국에게는 국익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었으며, 당시 러시아, 중국, 서구 열강에겐 복잡한 외교적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결국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일본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하게 됩니다.

 

문제는 지금도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였을까요, 아니면 정당한 독립투사였을까요? 이 질문은 단지 역사적 해석을 넘어서, 국제법이라는 기준 위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얼빈 의거는 특정 인물의 사망에만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 됩니다. 이 의거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 민족의 자결권을 향한 외침, 그리고 국제 사회에 보내는 메시지로 기능했습니다. 따라서 이를 단순히 범죄 행위로 치부하기보다는, 국제법적 틀에서 그 정당성을 따져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글에서는 안중근 의거의 성격을 국제법의 시각에서 조망하고, 현대 국제사회에서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테러리즘과 독립운동, 양 극단의 프레임을 넘어서, 보다 객관적인 법적 해석을 시도합니다.


2. ‘의사(義士)’인가 ‘테러리스트’인가: 시각의 갈림길

역사는 늘 승자의 기록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같은 사건도 누가 기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안중근 의거는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한국에서는 안중근을 ‘의사(義士)’라 부르며, 독립을 위한 순국열사로 추앙하지만, 일본은 한동안 그를 ‘암살자’, 혹은 ‘테러리스트’로 규정해왔습니다.

 

사실 테러리즘(Terrorism)은 그 자체로도 명확한 정의가 부재한 개념입니다. 테러는 일반적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폭력적 수단으로 정의되며, 주로 비정규 민간 조직에 의해 수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중근 의거도 이러한 외형적 특성을 갖추고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안중근은 특정 이익집단의 폭력주의자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사용했으며, 사살 대상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도 비무장 민간인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최고위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이토의 죄목을 열거하며 정당성을 주장했고, 국제사회가 이를 알아주기를 기대했습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살인행위가 아닌 정치적 목적이 명확한 반식민 투쟁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유사한 예는 많습니다. 예컨대,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역시 초기에는 ‘폭력주의자’, ‘테러리스트’로 불렸지만, 시간이 흐른 뒤 국제적 정의의 상징으로 재평가되었습니다.

 

결국 ‘테러’와 ‘독립운동’의 구분은 누가, 어떤 권력 구조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규정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는 법적 정의 이전에 정치적, 외교적 시각에 따라 흔들릴 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법의 객관적 기준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3. 국제법에서의 ‘테러’ 개념과 적용 기준

국제법에서 ‘테러리즘’을 명확하게 정의한 단일 협약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1999년 유엔이 채택한 ‘국제테러방지협약’ 및 다양한 유엔 안보리 결의에서는 테러행위를 ‘민간인에게 의도적으로 위해를 가하거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폭력행위’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안중근 의거는 ‘비무장 민간인을 겨냥한 대중적 공포 조성 행위’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일본 제국의 고위 공직자로서 식민 통치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로, 국가적 권력의 상징이자 군사적 권한까지 갖춘 존재였습니다.

 

또한, 안중근의 행위는 무차별적인 폭력 사용이 아닌, 명확한 정치적 의사 표현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휘말린 민간인 없이 단일한 목표를 정조준했고, 행위 직후 스스로 체포되어 국제사회에 자신의 정체성과 목적을 밝히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테러리즘의 특징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더불어 당시 국제법은 식민지 상황에서의 무장 저항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는 오히려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피지배국의 저항은 대부분 불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자결권’과 ‘반식민주의’ 흐름은 이러한 시각을 뒤엎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국제법상 테러리즘의 핵심 기준은 무차별성, 민간인 대상, 공포 조성, 정치적 목적이라는 네 가지 요소입니다. 안중근 의거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으며, 특정 국가 지도자에 대한 정치적 저항으로 분명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당시 기준에서 모호했을 수 있지만, 현재 기준으로는 명백히 테러리즘보다는 정당한 저항권 행사의 일환으로 해석될 여지가 큽니다. 이러한 논거를 토대로 다음 장에서는 식민지 지배 하 독립운동의 국제법적 지위를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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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식민지 지배 하 독립운동의 국제법적 지위

안중근 의거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시 국제법이 식민지 국가의 저항 운동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0세기 초 국제법은 대부분 유럽 열강의 시각에서 정립되어 있었고, 피식민 국가의 독립운동은 주권 국가의 반란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식민지 민중의 저항은 국제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엔이 창설되고, 자결권(self-determination)이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확산되면서 이러한 시각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특히 1960년 유엔 총회가 채택한 「식민지 국가와 국민에게 독립을 부여하는 선언」(유엔총회 결의 1514호)은 식민지 지배를 부정의로 보고, 모든 민족이 스스로의 정치적 지위를 결정할 권리가 있음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식민지 민족이 독립을 위해 무장 저항을 하는 행위는 국제법상 ‘저항권’ 또는 ‘자위권’의 일환으로 평가되기 시작했습니다. 즉, 피지배 민족의 폭력 행위가 일방적으로 불법으로 간주되던 과거에서 벗어나, 그것이 어떤 맥락과 목적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중요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안중근의 경우도 이에 해당합니다. 그는 이미 자주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의 국민으로서, 국가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군사적 행위에 나선 것이며, 무차별적인 테러가 아닌 표적화된 정치적 거사였다는 점에서 현대 국제법 기준에 부합하는 정당한 저항 행위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물론 1909년에는 자결권이나 저항권에 대한 국제적 합의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그 의미를 재해석한다면, 안중근의 의거는 민족 자결권 실현의 한 방식이자, 국제법상 정당한 반식민 투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재해석은 단순한 역사적 재조명이 아니라, 국제법의 진화와 보편적 인권 가치의 확대에 따른 합리적 해석입니다. 따라서 안중근 의거는 ‘그 당시’에는 범죄로 판단되었을지 몰라도, ‘오늘날’에는 권리 실현의 표현으로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5. 안중근 재판과 당시 일본의 논리, 국제사회의 침묵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러시아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일본 측에 인도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고,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재판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안중근을 형사범으로 규정하기 위한 정치적 재판이었습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전쟁행위’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개인 범죄가 아니라 전쟁법상 교전 행위라는 주장으로, 일본의 일방적 점령을 부정하고 국제법상의 전쟁 당사자 자격을 인정해달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안중근을 단순 살인자로 취급했습니다.

 

당시 국제사회, 특히 유럽 열강은 일본 제국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하얼빈이라는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에 피의자를 넘김으로써 사실상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국제 사회의 침묵은 당시 국제법이 실질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에 불과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식민지 국가의 국민은 국가도, 국민도 아닌 존재로 취급되었고, 따라서 국제법의 주체가 될 수도 없었습니다. 안중근의 재판이 국제법적 판단을 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당시의 국제법은 ‘법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작동했고, 정의는 승자의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러한 구조에 대한 비판과 재해석이 가능해졌고, 오늘날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재판을 ‘불공정한 정치재판’으로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안중근은 단지 이토를 죽인 ‘범죄자’가 아니라, 당시에는 부정당했지만 오늘날에는 인정받아야 할 국제법상 ‘독립운동가’이자 ‘정당한 교전 당사자’로 평가받아야 마땅합니다.


6. 현대 국제법 기준에서 본 안중근 의거

오늘날 국제법은 식민지 해방운동을 정당한 ‘국제적 권리 행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수차례에 걸쳐 무력 저항을 포함한 독립운동을 보호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유엔 헌장 제1조에서도 민족 자결권은 기본 권리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국제법상 '정당한 무력 저항'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군사적 직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특정 다수가 아닌 식민 통치의 상징적 인물을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비정규 교전 행위’로 해석할 여지가 큽니다.

 

무장 저항의 경우에도, 교전 수단의 정당성과 목적의 정당성이 갖춰져야 국제법상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거는 자결권 실현, 피식민 지배 저항, 명확한 정치적 메시지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요건을 충족합니다.

 

또한 그는 무차별 공격이 아닌, 단일 목표를 겨냥한 정밀한 정치적 행위를 수행했고, 체포 후에도 정당성을 조리 있게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현대 국제인도법(IHL)의 관점에서 볼 때, 최소한의 무력 사용의 원칙과도 부합합니다.

 

다만 현대 국제법은 국가간의 무력 충돌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어, 개인이나 민족해방운동과 같은 비국가 행위자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유동적입니다. 하지만 안중근은 개인 자격이 아닌, ‘의병 참모중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개인 범죄자로 취급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현대 국제법의 기준으로 본다면, 안중근 의거는 '비합법적 테러'가 아니라 '합법적 독립투쟁'의 범주로 평가받는 것이 타당하며, 이는 역사와 국제법 모두가 인정해야 할 사실로 남아야 합니다.


7. 결론: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정의, 그러나 변하지 않는 정신

역사는 끊임없이 해석되고, 법은 시대의 정의를 따라 움직입니다. 안중근 의거는 20세기 초에는 제국주의 질서 속에서 ‘살인’으로 평가받았지만, 오늘날 인권과 자결권의 가치가 확산된 세계에서는 정당한 독립운동으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테러’와 ‘투쟁’ 사이의 경계는 때로는 정치적으로, 때로는 윤리적으로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제법은 점점 더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있으며, 정의로운 저항이 억압받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보적 흐름 속에서 안중근 의사의 정신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조국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통해, 세계가 조선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의 의거는 국제 사회에 보내는 ‘정의와 자결의 메시지’였으며, 이는 지금도 유효한 가치입니다.

 

우리는 이제 안중근을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국제 정의의 상징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국제법이 그에게 미처 정의를 부여하지 못했던 시대를 넘어서, 우리는 그 정의를 복원할 책임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역사의 진실을 국제법의 언어로 해석하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법 정의이며, 국제사회의 책임이고, 우리가 안중근에게 보내야 할 진심어린 경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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