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국에서 역사보기

드라마 킹덤은 역사적으로 맞을까? 조선시대 역병의 실체와 그 진실

by 40대 유학&여행 2025. 5. 3.
반응형

 

목차:

  1.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의 배경과 역사적 상상력
  2. 조선시대에도 좀비가 있었을까? 역병에 대한 기록 탐색
  3. 조선의 의학과 방역체계, 실제는 어땠나
  4. 실록과 민간기록에 등장하는 전염병의 모습
  5. 역병은 정치와 권력의 도구였을까?
  6. 드라마와 현실의 경계: 킹덤은 어디까지 역사에 기대었나
  7. 조선의 전염병 대응이 오늘날에 주는 시사점
  8. 역병의 역사에서 배우는 공공의료의 교훈

 

1.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의 배경과 역사적 상상력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은 한국 드라마 역사상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좀비라는 장르적 요소에 조선 시대라는 역사적 배경을 결합하면서 국내외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한국적 세계관을 전 세계로 확장시킨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드라마는 ‘역병’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스릴과 정치 드라마를 교묘히 엮어낸다.

 

‘킹덤’은 조선 중기 또는 후기쯤으로 추정되는 시대를 배경으로, 역병이 창궐하고 왕조의 권력이 흔들리는 과정을 그린다. 특히 궁궐 내부의 권력 암투와 지방의 참혹한 상황이 교차되며 극적 긴장감을 높인다. 시체가 되살아나는 병이라는 설정은 분명히 허구지만, 전체적인 세계관은 상당 부분 실제 조선의 질병 대응 시스템과 정치 구조에 기대고 있다.

 

이 드라마의 주된 긴장 요소는, 죽은 자가 살아 움직인다는 설정이지만, 그 바탕에는 ‘백성의 고통에 무관심한 권력자’, ‘정보 통제를 우선하는 조정’, ‘의료 시스템의 부재’ 등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문제들이 깔려 있다. 이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정치적 은유로 기능한다.

 

실제로 조선 시대는 여러 차례 역병을 겪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천연두, 홍역, 콜레라, 장티푸스 등의 질병은 조선을 휩쓴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역병은 정치와 사회를 뒤흔들었고, 백성들의 삶에 직격탄을 날렸다.

 

‘킹덤’은 이런 실제 전염병의 위기 상황을 ‘좀비’라는 과장된 메타포로 풀어냈다. 허구적 요소가 가미되었지만, 배경에 있는 사회적 긴장과 정치적 불신, 의학적 무력함 등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드라마가 관객에게 주는 현실적 공포를 배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킹덤’은 단지 좀비물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사회 시스템의 균열과 질병이라는 위기를 맞닥뜨린 공동체의 실상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 조선시대에도 좀비가 있었을까? 역병에 대한 기록 탐색

드라마 ‘킹덤’에서 가장 충격적인 요소는 바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 움직인다는 설정이다. 이른바 ‘좀비’라는 존재는 현대 서구에서 탄생한 개념이지만, 조선 시대 기록에서도 이와 유사한 공포감과 괴기 현상에 대한 언급은 존재한다. 물론 그것이 진짜 좀비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그리고 여러 야사들 속에서는 역병이 창궐했을 때 시체가 땅에 묻힐 틈도 없이 산처럼 쌓였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한양이나 지방의 읍성 안에서 시신 처리가 늦어지면서 악취와 부패가 퍼졌고, 백성들은 밤마다 ‘귀신’이 나타난다고 호소했다. 이러한 현상은 질병이 만들어낸 심리적 공포의 반영이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지금보다 더 불명확하게 인식했다. 당시에는 갑작스럽게 죽었다가 다시 숨을 쉬는 사례가 기록되기도 했으며, 이런 경우는 ‘혼백이 돌아왔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이런 미신적 요소가 당시의 의학적 한계와 결합되면서 ‘죽은 자의 귀환’이라는 전승이 생겨났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후기에 유행한 천연두나 장티푸스는 고열과 전신 경련, 호흡 곤란 등을 동반했고, 급속히 사망한 뒤 피부색이 검게 변하는 등 외형적 변화가 심했다. 시신이 다시 움직이는 장면은 없었겠지만, 죽음을 앞둔 환자의 고통과 시체의 부패 과정이 보는 이에게 심각한 공포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한편, 민간 설화나 무속 이야기에서는 병든 자가 죽지 못하고 ‘살아서 저승에 붙잡혀 있다’는 식의 이야기도 존재한다. 이는 ‘킹덤’에서처럼 죽은 자가 다시 움직인다는 발상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다만 조선은 이런 현상을 ‘역귀’ 혹은 ‘악령’의 소행으로 간주했다.

결국, 좀비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질병과 죽음이 주는 공포를 초자연적 존재로 해석하며 유사한 상상력을 형성했다. ‘킹덤’은 이러한 전통적 인식의 현대적 해석이라 볼 수 있다.


3. 조선의 의학과 방역체계, 실제는 어땠나

조선은 유교 국가였으며, 인간의 건강은 곧 국가의 질서와 연결된 문제였다. 왕실과 관청은 질병 예방과 치료를 국가 행정의 중요한 과제로 인식했다. 하지만 문제는 체계적이면서도 과학적인 대응 시스템이 완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염병에 대한 이해는 미비했고, 대응도 한계가 많았다.

 

조선 시대에는 전염병이 발생하면 ‘질병’을 단순히 자연재해나 하늘의 노여움으로 해석했다. 무속 신앙과 점술, 부적을 통한 방역이 백성 사이에서는 흔히 쓰였으며, 궁중에서도 가끔 사용되었다. 의학적으로는 한의학을 바탕으로 한 ‘동의보감’이 국가 표준으로 활용되었지만,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대한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방역은 거의 봉쇄에 의존했다. 병이 돌면 병자가 속한 마을 전체를 봉쇄하거나 피난을 강요했고, 사람들 간의 접촉을 최대한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민심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은 ‘조정이 우리를 버렸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의료체계도 한계가 컸다. 대부분의 백성은 의원을 만나기 어려웠고, 왕족과 고위관료만이 내의원, 혜민서 등의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었다. 지방에는 의약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약방 자체도 매우 적었다. 이러한 구조는 병을 개인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나름의 대응 시스템을 갖추려 했다. 전염병 발생 시 '역마차'의 통행을 중단하고, 역참을 폐쇄했으며, 유교적 질서에 기반하여 부고나 제사를 미루도록 명했다. 이는 조선 정부가 질병을 사회적 질서의 붕괴로 인식했다는 방증이다.

 

드라마 ‘킹덤’에서처럼 병에 걸린 사람을 몰래 숨기거나 정보 차단으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장면은 조선 시대 실제 사례에서도 관찰된다. 당시 조정은 민심 동요를 우려해 전염병 규모를 축소 보고하거나 은폐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응형

 

4. 실록과 민간기록에 등장하는 전염병의 모습

조선왕조실록은 왕조 중심의 공식 역사 기록이지만, 전염병과 관련된 기사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실록의 여러 대목에서 “역병이 돌아 수백 명이 죽었다”, “전라도에 온역(瘟疫)이 퍼져 군민이 도망하였다”는 식의 기록이 확인된다. 특히 세종, 성종, 인조, 숙종 시대에는 대규모 전염병이 자주 등장하는 시기였다.

 

대표적인 예로, 인조 14년(1636)에 발생한 전염병은 병자호란과 겹쳐 민심을 크게 동요시켰다. 실록에는 병이 발생한 지 며칠 만에 “시체가 거리에 널려 있고, 관을 짤 나무조차 부족하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의 의료 및 행정체계가 전염병에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민간기록인 『연려실기술』이나 『동국문헌비고』 등의 사찬서에는 실록보다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묘사가 담겨 있다. ‘마을 전체가 병들어 사라졌다’, ‘밤마다 괴질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등의 표현은 백성의 고통을 그대로 드러낸다. 지방 관청이 이를 무시하거나 방기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흥미로운 점은 전염병이 단순한 병리 현상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 ‘징벌’이나 ‘하늘의 노여움’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은 전염병이 돌 때마다 사직에 제를 올리고, 신하들은 상소를 올려 “국정에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식의 자성론을 펼치기도 했다.

 

실록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 중 하나는 “의원이 부족하여 병자를 돌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의술의 문제보다 의료 인력 및 체계 부족이 문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구조적 취약성이 역병 피해를 더욱 심화시켰던 것이다.

 

결국 ‘킹덤’이 묘사한 전염병 상황은 단지 상상력이 아니라, 당시 역사기록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이 좀비이든, 아니든 간에 ‘치료할 수 없는 병’과 ‘정보를 통제하는 권력’은 당시 백성들에게 실재하는 공포였다.


5. 역병은 정치와 권력의 도구였을까?

조선 시대의 역병은 단지 생물학적 위협이 아니라, 권력 구조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역병이 발생하면 정치적 책임 소재가 분산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적 제거나 여론 조작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는 드라마 ‘킹덤’에서 묘사된 ‘역병을 감추는 권력자’라는 이미지와도 연결된다.

 

왕실은 전염병을 통제하고 진압하는 것에 있어 직접적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역병이 장기화되거나, 지나치게 확산되었을 경우, 민심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이는 왕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를 막기 위해 조정은 역병 발생 사실을 축소하거나 지연 보고하는 경우도 많았다.

 

드물지만 일부 권력자들이 역병을 핑계로 정치적 숙청을 시도한 정황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비위생적인 관료가 병을 퍼뜨렸다’는 주장을 근거로 특정 인물을 제거하거나, 백성의 불만을 다른 지역이나 세력으로 돌리기도 했다. 이는 전염병이 정보가 아니라 ‘정치적 상상력’의 재료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또한 조선 정부는 역병의 원인을 당시 유행하던 이단 사상이나 도참설에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천주교 확산기에 발생한 역병은 “이단의 화가 하늘을 노하게 했다”는 식으로 해석되며, 천주교도 탄압의 정당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은 결국 백성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공포를 조장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 점에서 ‘킹덤’에서 묘사된 정보 은폐, 책임 회피, 정치적 이용이라는 전개는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역병은 단지 의학적 위기가 아니라, 조선 사회의 권력 작동 방식을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다. 그것이 바로 ‘킹덤’이 현실성을 획득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6. 드라마와 현실의 경계: 킹덤은 어디까지 역사에 기대었나

‘킹덤’은 팩션(faction), 즉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결합한 장르의 대표적 사례이다. 작가 김은희는 실록과 역사서를 바탕으로 조선 시대의 정치 구조와 백성의 삶을 고증하면서, 그 위에 상상력을 덧입혔다. 좀비라는 허구적 존재 외에도 등장인물의 신분, 복식, 언어 등은 매우 정교하게 재현되어 있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드라마가 현실을 허구보다 더 무섭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드라마 속 권력자들은 역병을 자신의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고, 백성은 무방비 상태에서 죽어간다. 이는 조선시대 백성들이 실제로 겪었던 공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작품의 배경이 된 ‘세자’라는 존재도 현실과 맞닿아 있다. 조선의 세자는 성인이 되기 전 권력에 접근할 수 없었고, 외척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속 세자가 감염병의 실체를 밝혀내려 고군분투하는 장면은, 실제 역사 속에서 권력과 진실 사이에 끼인 왕족들의 상황을 상징한다.

 

극중 등장하는 의녀, 의원, 지방 관리 등도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존재이며, 이들이 보여주는 무력감과 고군분투는 조선 후기 의료 시스템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혜민서의 기능적 한계는 백성들이 의료의 사각지대에 얼마나 방치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좀비라는 비현실적 설정 외에는, ‘킹덤’의 서사 구조 자체가 매우 현실적이고 역사적이다. 이는 작품이 공포를 자극하는 동시에, 시청자로 하여금 역사와 사회를 성찰하게 만드는 기제로 작동한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단순한 좀비 스릴러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역사적 무대를 활용한 정치극, 그리고 방역 실패의 인간사를 그린 교훈극으로 읽히기도 한다.


7. 조선의 전염병 대응이 오늘날에 주는 시사점

조선 시대의 전염병 대응은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미흡하고 비효율적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나름의 사회 시스템을 통해 위기를 관리하려는 시도가 분명 존재했다.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실패와 한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조선은 전염병의 규모나 원인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고, 기록 또한 제한적이었다. 이는 정보 부재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도 감염병이 발생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정보의 공유’라는 사실을 우리는 조선의 사례에서 역으로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의료 인프라의 부족은 국가적 위기를 확대시킨다. 조선은 관료 중심 사회였지만, 방역에 있어서만큼은 지방 자치나 주민 참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는 중앙정부의 역량이 떨어질 경우, 지역사회가 혼란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민심을 다독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역병에 대처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위협은 공포와 불신이다. 조선이 민심 관리에 실패했을 때 역병은 사회 전체를 무너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는 현대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넷째, 특정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는 방식은 어떤 위기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조선은 종종 전염병의 책임을 종교 집단이나 정치적 반대 세력에게 돌렸고, 이는 사회의 분열을 낳았다. 위기 상황에서의 포용과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사례다.

 

결국, 방역은 단지 의료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결단, 정보 투명성, 사회적 연대가 종합적으로 작동해야 가능한 일이다. 조선의 실패는 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역사적 교훈이다.


8. 역병의 역사에서 배우는 공공의료의 교훈

‘킹덤’이라는 드라마는 단순히 재미있는 허구가 아니라, 역사 속 실체에 기반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조선시대 역병의 실상을 살펴보면, 당대 사람들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서 국가의 역할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유효한 이유다.

 

전염병은 시대를 불문하고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 조선은 왕조 체제라는 특수성 때문에 백성의 건강을 국가의 도덕성으로 연결지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권력의 이해관계, 의료 자원의 편중, 정보의 폐쇄성 등이 방역 실패의 핵심 원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조선보다 훨씬 발전한 의학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공의료 시스템의 불균형, 정치적 갈등, 사회적 불신은 여전히 감염병 위기를 키우는 구조적 요인으로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조선의 실패는 남의 일이 아니다.

 

특히 팬데믹 시대를 겪은 현대인들에게 ‘킹덤’이 주는 메시지는 더욱 뼈아프게 다가온다. 전염병은 언제든 다시 올 수 있고, 그것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과거로부터 배워야만 한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유사한 구조로 재현된다. 조선시대의 역병은 오늘날의 공공의료 체계를 돌아보게 만들며, 국가가 어떤 가치를 우선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공포를 숨기는 것이 아닌, 투명한 정보 공유와 사회적 신뢰 회복이 가장 중요한 방역의 첫 걸음이다.

 

따라서 ‘킹덤’을 통해 조선의 역병을 다시 바라보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을 넘어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구조와 위기 대응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일이다.



반응형